지난 11월 22일, 영국의 성전과 학교 등 30개 건물이 붉은빛으로 물들었습니다. ACN은 종교 자유를 위한 표징으로 이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지난달에는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의 성심 성당을 붉게 밝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ACN의 활동이 신앙을 지키려 목숨을 바친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종교 자유라는 주제에 인식을 높이는 효과가 있을까요?
저는 이러한 활동이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열렬히 지지합니다. 물론 바탕에 놓인 가치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며 이를 지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마치 어떤 세속화된 성탄절 기념 전등 행사 같이 이 행사가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 토마스 베켓, 성 토마스 모어, 성 존 피셔가 순교한 이곳 영국에서 인간 존엄, 종교 자유, 고귀한 양심의 증거로서 순교의 가치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순교록(Martyrologium,가톨릭교회의 공식 순교자 전기)은 교회가 쇄신할 때 다시 한번 중요한 기록이 됩니다.
교황님은 그리스도교 박해에 대해 침묵하지 말라고 지속해서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박해받는 그리스도인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신앙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한 수많은 순교자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침묵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ACN은 교황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인을 향한 폭력을 비판하고, 박해받는 그리스도인을 보호하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합니다. ACN의 외침은 해야만 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 독려했던 예언자들의 목소리와 같습니다. 식량과 정의에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그들 안에서 예수님을 보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그의 눈물을 닦아드리기 위해 깊은 신앙으로 기도하고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박해자까지도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몸체로 존중하면서도, 서로서로 연관된 각각 구성원들이 결국 중심이라는 것도 이해해야 합니다. 가정, 본당, 여러 공동체, 교육시설 등은 각자 구성원들이 이 주제의 전체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조력해야 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박해의 문화적 맥락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서도 공공연하지는 않더라도 심각한 박해들이 일어납니다. 은밀하고 은근한 박해이지요.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교와 관련한 것을 “체계적으로” 없애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리적 폭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는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며 공격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역사적, 예술적, 사회적 차원에서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추기경님, ACN은 2016년 4월 29일,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상징으로 로마 트레비 분수를 붉게 밝히기도 했는데요. 오늘날 서구사회에 신앙으로 고통받는 수백만 명의 형제자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가요?
이는 무엇보다 양심에서 비롯되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순교가 본디 문명의 요소를 대표한다는 것, 즉 진정한 자유와 사랑의 가르침을 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건축물과 기념물을 물들이는 붉은 색은 피의 상징으로, 순교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순교자 당사자뿐만 아니라 인류를 위한 속죄를 대신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순교자와 다른 순교자들의 다른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교의 종려 가지를 손에 들고 절대 썩지 않을 관을 쓰고 찬란한 천국에 들어간 순교자들을 높이는 노래를 하느님께 올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신 유일무이한 십자가의 치유는 오늘날 바로 그들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그 힘이 약해지지 않으며, 믿음, 사랑, 연속성 안에서 더욱 풍성해지는 순교의 구조적인 특징을 가집니다. 또한, 우리는 사라지는 이상들이야말로 누구도 목숨을 바칠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