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당시 “Oostpriesterhulp(동쪽 사제들 지원)” 라고 불렸던 ACN은 교황청 동방교회성 장관인 티세란트 추기경으로부터 동유럽 이민자들을 위해 신학원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티세란트 추기경은 또한 1946년에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해산된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스투디우스 수도회의 복원을 위해 지원해 줄 것도 함께 요청하였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요제프 슬리피 대주교는 1963년 1월, 18년 간의 감옥생활과 강제노동 끝에 풀려난 직후, 로마에서 ACN의 창립자 베렌프리트 판 슈트라텐 신부를 만났다. 판 슈트라텐 신부는 망명 중에 있던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를 돕기로 약속하였고 같은 해에 지원이 시작되었다. 1984년 요제프 슬리피 대주교가 로마에서 사망했을 당시 ACN은 망명 중인 우크라이나 가톨릭교회를 위해 1,000만 달러를 지원한 상태였다. 대부분의 지원금은 우크라이나 교회의 해방의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배정되었다.
ACN은 1989년, *철의 장막에 갇힌 사람들을 위해 수백권의 종교 서적을 보내는 성경과 기도캠페인을 시작하였다.
* 철의 장막 –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가 채택한 정치적 비밀주의와 폐쇄성을 자유주의 진영에서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
우크라이나어 성경, 교리교재 및 기타 종교 서적으로 가득찬 박스들이 ACN본부에 도착해
우크라이나로 보내졌다.(출처=ACN 자료사진, Germany, Königstein April 1989)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미로스라브 루바치브스키 추기경은 1991년 3월 30일 로마에서의 망명을 끝내고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다. 이 날은 ACN이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교회 재건을 위한 지원을 시작한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1993년부터 우크라이나의 보스크레시냐(부활) 프로그램은 우크라이나 공영방송 라디오에서 방영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이 방송은 ZHYVE TV를 비롯하여 EWTN 라디오와 Maria 라디오를 포함하여 동방과 로마의 전례를 아우르는 ACN의 미디어 지원의 핵심 프로젝트이다. 이 미디어는 우크라이나 내의 종교간 대화에 큰 기여를 했다.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종교박해의 시절이 끝났지만 ACN은 계속해서 우크라이나 내의 가톨릭 교회를 지원했다. 1990년 마침내 카타콤바를 떠나게 된 이후, 재정적으로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을 다해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종교박해 동안 특히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건물이 모두 붕괴되는 등의 큰 타격을 입었다. 1989년 12월 1일 입법화 당시,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제, 수도자 및 평신도들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외부의 재정적 지원 없이 교회의 재건은 불가능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