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빌(Erbil)은 반이 사막으로 둘러싸인 주변 환경과 함께 섭씨 44도까지 올라 압도적인 열기를 뿜어내는 이라크 여름의 불볕더위를 자랑하는 곳이다. 쿠르디스탄의 수도인 이 도시에 처음 발을 내딛으면 평화롭기까지 한 분위기에 기만 당한다. 2014년 8월 6일, 이 지역에서 수만 명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은 이곳에서 불과 25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불과 일주일 전에는 도시 성문 바로 앞에 있었다. 교회 담장 뒤, 학교와 스포츠 센터, 반쯤 완성된 건물 그늘속에 최대 7만 명에 이르는 난민들이 22개의 수용소로 흩어지게 되는 현실이 가려져었었다.
아르빌의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인 앙카와(Ankawa)에 위치한 이라크 칼데아 가톨릭 교회의 성 요셉 주교좌 대성당은 이 도시의 거점 중 하나이다. 약 670여 가구가 이곳과 인근 건물에서 피난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임시 방수포나 건물 그늘은 이들이 견디기 힘든 불볕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다. 대부분은 가족 단위로 바닥에 매트리스나 수면용 매트를 깔고 앉아 있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앙카와는 하나의 거대한 대기실이 되었다. 이 수만 개의 얼굴들 있는 이곳, 바로 그들 모두를 이어주는 단 하나의 이야기, 증거, 그 목적지는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은 난민이라는 점이다.
앙카와의 성 요셉 주교좌 대성당에 머물고 있는 어린 피난민들(출처=ACN자료사진)
10만 그리스도인의 탈출기
2014년 8월 6일, 이라크 모술(Mosul) 북쪽의 그리스도인 지역을 지키던 쿠르드 민병대인 페쉬메르가(Peshmerga) 전사들이 철수했다. 첫 번째 폭탄이 카라코쉬(Qaraqosh)의 알리야스(Alyias)씨 가정에 떨어져 정원에서 놀던 두명의 어린이 데이비드와 미라트가 사망하고 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다. 경보가 도시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다에시(IS,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가 성문 안으로 들어왔어요! 페쉬메르가는 더 이상 우리를 지키지 않으니 가족을 데리고 도망치세요!” 카라코쉬는 인구 약 5만 명이 거주하던 도시로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다. 사람들은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들고 떠났다. 집을 떠날 수 없는 병자와 어르신들만 남았다. 카라코쉬 주민들은 바르텔라, 카렘레쉬 등 주변 지역의 다른 작은 마을에서 온 사람들과 합류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총 10만 명으로 추산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니네베 평원의 집을 떠나 두호크, 자코, 아르빌을 향해 묵시론적인 종말 상황의 피난을 감행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수년 동안 이슬람 근본주의에 억눌리고 공격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6월 10일, 모술 방어를 시도하지도 못한 채 다에시군이 단 몇 시간 만에 모술을 점령한 트라우마를 아직도 뼈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정치인, 정부군, 그 누구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모든 가정에 들이닥친 비극
사담 후세인 축출 이후, 모술에서만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신앙 때문에 살해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모든 가정은 저마다의 비극과 극적인 사연을 갖게 되었고,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는 살해당하거나 학살당했다. 피난민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제 형의 이름은 ‘살만’입니다. 형은 당시 43살이었고, 5년 전 모술에서 그들은 형의 머리에 총을 세 발이나 쐈습니다.” 그의 옆에 있던 어머니는 사진을 천천히 꺼내 들었는데, 그녀의 행동과 눈빛에는 너무나도 큰 고통이 서려 있었다. 이들은 모술에서 도망쳐 친척이 있는 마르 마타이(성 마태오) 고대 수도원 근처의 마을로 피신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다시 꿈꿨지만, 다에시의 침공으로 또 다시 피난을 떠나야 했다.
살해당한 아들(살만, 당시 43세)의 사진을 보여주는 한 어머니(출처=ACN자료사진)
이들과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의 또 다른 피난민인 야쿱은 2008년 모술 성당에서 폭발한 폭탄으로 인해 불구가 되고 자신의 다리에 남겨진 상흔을 보여주었다. 7월 지하디스트들이 모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최후통첩을 한 7월, 야쿱은 네 딸과 함께 알코쉬(Al Qosh)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그는 2주 후 두훅(Duhok) 북쪽으로 두 번째 피난을 떠났다. 그는 집과 땅, 그리고 소유했던 모든 것을 잃었고, 파괴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러나 야쿱에게 가장 큰 슬픔은 다리에 남은 상흔이 아니라 네 딸의 미래이다.
아이들의 운명
시리아 정교회의 여섯 가정 중 열 여섯의 자녀를 둔 한 어머니는 망게쉬(Mangesh) 칼데아 공동체의 천막을 피난처로 삼고 있다. 그녀는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무언으로 호소했다.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있던 한 소녀는 영어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를 사랑해, 그들은 모두 나를 사랑해” 전쟁, 증오, 학살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는 이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이렇게 많은 아이가 있는데 장난감이나 인형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많은 아기가 바닥이나 작은 이동식 아기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슬레이만은 세 살배기 딸을 품에 안고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이 아이가 무슨 짓을 했길래 고향 땅에서 쫓겨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란 지옥 같은 더위와 여덟 가구가 한 방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교회가 제공하는 식량과 물로 생활하는 비인간적 환경을 의미한다. 아르빌에서는 스포츠 센터의 방에 더 이상 공간이 없어 야외에 텐트를 설치했다. 각 텐트에는 약 8명이 거주한다. 낮에는 텐트 내부 온도가 48°C까지 올라가는 극심한 폭염으로 인해 지옥과도 같으며 밤에는 쥐와 전갈에 물릴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아내와 딸의 명예, 그리고 신앙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가 이들이 서둘러 탈출한 주된 이유이다. 그리고 이 신속한 탈출로 이들은 학살과 강간 그리고 노예로 전락당한 야지디족 공동체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니네베, 카라코쉬, 알코쉬, 텔펙 등 많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 그 이상, 즉 희망을 빼앗겼다.
피난민들의 거처가 된 시리아 가톨릭교회의 성지(출처=ACN자료사진)
피로 흠뻑 젖은 땅
카라코쉬에서 다에시의 폭탄 테러로 사망한 소년 중 한명인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 없다”고 한탄했다. “이 나라는 피로 흠뻑 젖었습니다.” 상복의 옷차림을 한 젊은 어머니는 손에 머리를 파묻고 울부짖었다. 이들에게는 서류도, 여권도 없다. 그들은 비자를 어떻게 신청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든 상관없으니 이 고통의 땅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이곳에는 이들의 트라우마와 비극을 다룰 수 있는 전문 인력이 없는 상황이다. 이들은 다른 난민들과 함께 앙카와의 한 학교에서 지내고 있다.
그의 동생 아디브는 모술의 댐에서 일했었다. 그는 서툴지만 분명한 영어로 이렇게 물었다. “왜 외부의 무슬림들은 유럽 국가에서 그들의 권리를 인정받는 반면 우리는 이곳에서 개처럼 취급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심지어 우리는 외부 사람도 아니에요, 여긴 우리나라잖아요?” 아디브는 니네베 평원,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 2세기부터 존속해온 모술의 그리스도인들, 성 마태오 수도원, 그리스도의 모국어인 아람어, 시리아 및 칼데아 가톨릭과 정교회 공동체, 그리고 수 세기를 이어온 종교와 그 문화유산 전체에 얽힌 성경적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이 죽음으로 상처 입었다고 전했다.
도움과 위로의 닻으로서 존재하는 교회
그러나 이 과거는 현재에도 실재하며 계속되고 있다. 사제, 수도자 및 주교는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돕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지 연락하고, 구성하고, 질문하고, 듣고, 상담하고, 기도하고 있다. 만약 이곳에 교회가 없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누가 그들을 돌볼 수 있었을까? 6만여 명의 그리스도인 난민이 도시 북쪽의 마을들과 터키 국경까지 흩어져 있는 두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놀라운 일을 하고 있다.
사미르 신부는 두훅 북쪽 마을의 이라크 칼데아 가톨릭 교회 사제이다. 그는 밤새, 그리고 다음날 아침까지 수많은 사람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차 안과 길바닥에서 잠을 자는 등 수많은 이의 탈출이 시작되었던 첫날의 충격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재 본당 교리 센터에만 시리아 정교회 신자 77개 가정, 총 321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 중 35명이 어린이다. 사미르 신부는 새벽 한두 시가 되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그의 일과는 그때까지 단 한순간도 쉼 없이 계속된다. 밤 10시가 되자 사미르 신부의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왔다. 야지디족 두 가정이 아무것도 없이 길에 있다는 전화였다. 사미르 신부는 그들을 찾아 매트리스를 가져다주고 그들이 여동생의 집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두훅 지구 북부의 시리아 정교회 공동체를 방문한 칼데아 가톨릭 교회 에밀 노라 대주교(출처=ACN자료사진)
모술의 칼데아 가톨릭 교회 에밀 노나(Emil Nona) 대주교는 추방당하고 집을 잃은 다섯 명의 주교 중 한 명이다. 그는 사제와 함께 식료품 꾸러미를 들고 공동체를 방문하여 매트리스, 텐트, 냉장고, 의약품 등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다. 노나 대주교는 또한 그들을 상담하고 격려한다. 고통받는 교회가 진정으로 복음을 실천하는 영웅적인 교회와 마주하는 시간이다. 이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의 지원과 기도, 연대가 필요한 교회이다.
아르빌, 두훅, 자코 등 이라크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눈물을 통해 고통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며, 희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인간의 희망은 사라지고 그리스도교의 희망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이구동성으로 부르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 이대로 계속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이라크 그리스도인들은 재난의 피해자로서 누군가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 주기를 바라며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국제 사회가 응답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교회만이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그리스도교의 원조 활동 그 이상의 문제이며, 고대 문화와 종교의 현재, 과거, 미래를 구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그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 숨이 막히는 임시 캠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즉각적인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또한 이라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이자 정체성이며, 자신들의 조상과 할아버지들이 살던 땅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보호와 안전 등 지속적인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