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가톨릭교회 라틴 총대주교 피에르바티스타 피자발라(Pierbattista Pizzaballa) 추기경은 성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위기가 단기간 내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지만, 이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희망적이라고 밝혔다.
피자발라 추기경은 가자지구 전쟁이 곧 종식될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군사작전 중단이 곧바로 평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경고했다.
교황청재단 가톨릭 사목 원조기구 고통받는 교회 돕기 ACN의 주최로 열린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피자발라 총대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가자지구 전쟁의 정점은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헤즈볼라와의 휴전도 가자지구와 하마스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주 또는 몇 달 안에 어떤 형태로든 타협에 이를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군사적 적대행위가 끝난다고 해서 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군사작전이 끝나고 나면 가자지구의 삶은 어떻게 될까요? 누가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재건에는 수년이 걸릴 것이고, 이스라엘과의 국경은 계속 폐쇄될 것이 분명한데, 이곳 주민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ACN 본부를 방문한 예루살렘 가톨릭교회 라틴 총대주교 피에르바티스타 피자발라 추기경(출처=ACN 자료사진)
ACN 본부를 방문한 총대주교는 현재 성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의 불신 분위기를 지적하며 “가장 우려되는 것은 증오의 수준입니다. 증오 발언, 경멸적인 언사, 타인에 대한 부정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전에도 전쟁을 겪었지만, 2023년 10월 7일을 기점으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때 자행된 폭력의 성격과 양측 주민들이 받은 정신적 충격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 사건이 일종의 ‘쇼아'(홀로코스트)였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그 이후 벌어진 일은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는 제2의 ‘나크바'(대재앙)였습니다.”
*쇼아(홀로코스트):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나크바(대재앙):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직후 팔레스타인인 70만 명이 고향에서 쫓겨난 사건
총대주교는 이렇게 덧붙였다. “마침내 가자지구 전쟁이 끝나면 사회 기반 시설은 재건할 수 있겠지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총대주교는 인구의 1.5%에 불과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특별한 소명을 지닌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소수이고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이 없기에 오히려 모든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상처와 분열이 가득한 이곳에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를 위한 중요한 사명이 될 것입니다.“
일치를 향한 노력
성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인은 소수이고 라틴 전례를 따르는 가톨릭 신자는 더욱 적지만, 그 안에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아랍계 그리스도인이 다수를 이루고 있지만, 소규모 히브리계 가톨릭 공동체와 이주민 및 망명 신청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도 있다. 피자발라 총대주교는 컨퍼런스에서 이러한 공동체들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때로는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ACN 본부에서 온라인 기자회견에 참석한 피에르바티스타 피자발라 추기경(출처=ACN 자료사진)
“전쟁 중에 모두가 분열되어 가는 와중에도 우리는 일치를 지키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이는 특히 전쟁 초기에 매우 어려웠습니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시각과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지만, 전쟁이 끝나면 우리의 다름에 대해 그리고 일치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건강한 과정이 될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더 깊고 진지한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희망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성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의 전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전쟁 발발 이후 이스라엘에서 일하던 서안지구의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취업 허가를 취소당했고, 성지순례 관련 관광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이들은 관광이 전면 중단되면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총대주교는 “예수님의 땅에서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계속 살아 숨 쉬게 하려고“ 그리스도인들의 존속이 필수적임을 강조하면서, 희망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 더불어 이는 위기에 대한 단기적인 정치적 해결책과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정치적 해결책에서 찾는다면, 단기적 해결책이 보이지 않기에 희망도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틀리기를 바라지만,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총대주교는 이어 이렇게 역설했다. “하지만 희망은 삶의 자세이며, 현실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신앙은 지상의 삶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처한 어두운 현실을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오직 신앙으로만 가능하며, 지금도 여전히 가능한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를 그저 바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현실입니다. 가자지구에서 서안지구, 예루살렘,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저는 어디서나 타인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된 훌륭한 이들을 만났습니다. 이타적 사랑의 실천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으며, 이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시적인 정치 상황은 바꾸지 못할지 몰라도,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는 무언가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게 위안이 됩니다.“
(왼쪽부터) 안톤 레서 ACN 지도신부, 필립 오조레스 ACN 사무총장,
피에르바티스타 피자발라 추기경(예루살렘 가톨릭교회 라틴 총대주교), 레지나 린치 ACN 수석대표(출처=ACN 자료사진)
피자발라 총대주교는 “때로는 저도 곳곳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보며 무력감을 느끼지만, 우리 교회 차원에서 지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지원을 보며 희망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회견에서 피자발라 추기경은 오랫동안 성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지원해온 ACN에 감사를 표했다. ACN은 2023년 10월 전쟁 발발 이후 지원을 더욱 확대해왔다. 총대주교를 기자회견에 초청한 레지나 린치 ACN 수석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후원자분들의 도움으로 위기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120만 유로 이상 규모의 긴급 구호를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ACN은 긴급지원 프로젝트를 통해 비상식량과 식수 및 의약품 공급하고, 일자리 기회를 제공하는 등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ACN의 사명은 성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적 지원만을 제공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도 우리의 소명입니다. 또한, 때로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종교와 민족 간의 화해와 평화를 증진하는 것도 우리의 책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