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1일 아침, 검은 말이 끄는 마차가 프라하성 앞 광장에서 멈추어 섭니다. 신학생 6명은 조셉 베란 추기경의 유해가 든 관을 어깨에 지고 성비투스 대성당으로 들어갑니다. 성당 안에서는 체코국가 ‘나의 조국은 어디에’가 연주되고 수천 명이 함께 노래합니다. 시복을 앞둔 조셉 베란 추기경은 선종한 지 5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조셉 베란 추기경의 유해는 프라하 데유비체(Dejvice)지역의 교구 신학교에서 하루 동안 임시로 안치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추기경은 게슈타포에 붙잡혔고 이후 3년 동안 테레진과 다하우 포로 수용소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가 다하우 수용소에서 풀려난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1945년 4월 29일 수용소 지휘관은 미군의 진격 소식을 듣고 수감자를 모두 죽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나치 친위대가 이를 실행하기 전에 미군들이 도착했고 베란 추기경과 동료 수감자들은 구출될 수 있었습니다. 베란 추기경은 성모님과 프라하의 아기 예수님의 중재로 이 기적이 일어났다고 여겼습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프라하에서 언제나 기도하며 도움과 보호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베란 추기경이 맨 처음으로 한 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라하의 아기 예수상이 있는 재단을 찾은 것입니다. 그곳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 오래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1946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대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공산정권에 맞서기로 결연히 결심합니다. 1949년 그는 “우리는 하느님을 존중하지 않는 정권에 절대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론했습니다. 몇 시간 후 그는 구금됐고 무려 16년간 여러 감옥과 수용소에 격리되었습니다. 베란 추기경뿐 아니라 수천 명의 사제와 수도자도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1965년 그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됐습니다.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체코 밖으로 추방되었고, 로마에서 망명자 신분으로 생활하다가 1969년 선종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그의 유해를 체코로 이송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로마의 성베드로대성당에 안장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대우로 그가 당시까지 교황 곁에 안장된 유일한 체코인이었습니다. 50여 년이 흐른 후 마침내 오랜 바람이 이루어져 조셉 베란 추기경은 전대미문의 승리 행진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때 조셉 베란 추기경이 교수로 있던 프라하의 신학교에는 젊은이 19명이 사제가 되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그들은 박해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체코의 교회는 이제 자유를 얻었지만, 체코인 대부분은 무신론자가 되어 신앙을 멀리합니다. 반면 자신들의 가족을 이룬 후에 신앙을 발견하고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는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체코에는 신자들과 하느님께 이르는 여정을 함께할 좋은 목자들이 필요합니다.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여러 세대 동안 부정되고 찢긴 그리스도의 가치를 지켜야 합니다. ACN은 체코의 사제 양성을 위해 9,500유로(약 1200만 원) 지원을 약속했습니다.